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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국시대
작성자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    [ 211.178.20.4 ] 날짜 2003-12-01
이메일 조회 7164
내용

한단시대 7000년은 인간의 신성을 중심으로 삼는 높은 의식이 사회를 주도했던 시대였다.
특히 단군조선 시대에는 방대한 수의 부족들과 나라들이 단군의 지배아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았었다. 그런데 고열가 단제의 폐관을 기점으로 인간완성의 기준을 잃어 버렸으며 그로부터 인류 전체는 神性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獸性을 중심으로 한 약육강식의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단군 조선이 쇠망 한 후 얼마간은 스스로 단군의 후예임을 칭한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가 가장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후 차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강성해지고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면서 4국 시대를 맞게된다.
    
부여  
1. 북부여
  단군 조선시대의 부여국은 단군왕검 임금의 넷째 아들인 부여를 오늘날의 만주 하얼빈 서남방에 위치한 부여 지방의 후(候)로 봉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부여는 남으로 발해만, 서로는 난하 및 천진 지방, 동으로는 대능하 유역까지를 강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 고열가의 종실이었던 해모수는 단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웅신산에 제실을 짓고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제위에 오른 후 북부여를 건국(기원전 239년 4월8일) 했으며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올랐다.  

2.북부여의 번성과 멸망
  단군 조선의 진 조선과 번 조선을 차지한 북부여는 자연 강한 군사력을 가졌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했으며 몸집이 크고 성격이 굳세며 용감하여 다른 나라와 싸워 진일이 없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북부여 4대 고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재위 1년만에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에 쫓기어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후 동부여, 혹은 가섭원부여 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두법 으로는 갈사국이라 표현했으며 지나의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옥저(沃沮)라고 불렀다.
5대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던 부여는 이후 세력이 커진 고구려에 병합되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지 108년만에 막을 내렸다(단기 2355년)


고구려
현재 고구려는 단기 2775년(서기전 194년)고주몽이 건국한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호태왕비와 기타 여러 사료를 통해볼 때 조선이 멸망한 후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 고구려가 건국된 것을 볼 수 있다  

1.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 아니라 900년이다.
1) 호태왕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광개토대제는 고구려의 19대 임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제의 공적을 기록한 호태왕비에는 호태왕이 동명성왕이후 17세손 이라고 기록했다.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것 도 아니고 서거한지 2년 뒤, 아들인 장수제에 의해 세워졌는데 잘못 기록해 놓을 리가 없다
그 비밀은 대(代:19대)와 세손(世孫:17세손)은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등이 왕위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4대 민중제= 3대 대무신제의 동생
     6대 태조제= 2대 유리명제의 손자
     7대 차제=  6대 태조제의 동생
     8대 신대제= 7대 차제의 동생
     10대 산상제= 9대 고국천제의 동생
     18대 고국양제= 소수림제의 동생

북한학자 김일출은 이 경우 6대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6세대가 삭제되었으며 따라서 광개토대제는  19대가 아니라 25대왕, 동명성왕의 17세손이 된다. 그렇다면 1세대당 30년씩 계산해도 약 200년 정도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올라간다.

2)삼국사기의 고구려비기    
고구려가 망하기 전 당의 군사밀정인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에게 한 보고의 내용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 고려비기(高麗秘記)라는 책에 고구려가 900년이 못되어 80먹은 대장에게 멸망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한나라 건국(=기원전 221년)때부터 나라가 있었으며 지금(668년)이 꼭 900년이 되는해 이며(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이세적 장군의 나이가 마침 80세입니다.

2. 고구려의 성장  -3페이지
  고구려건국 시조인 東明聖帝의 연호는 다물 이었다. 다물 이란 땅을 되 물린다는 의미의 고어이며, 단군 조선의 잃어버린 정신과 영토를 다시 찾는다는 염원이 서린 말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조선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건국초기부터 고토
회복을 위해 주변 소국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통합에 나서, 동명성제 대에는 비류국(沸流國),해인국(海人國)과 북옥저(北沃沮)를 2대 유리명제 대에는 선비족(鮮卑族)과 양맥(梁貊)을, 대무신제 대에는 개마국(蓋馬國)구다국(句茶國) 낙랑국(樂浪國)을 차례로 병합하였다.

소국들을 병합하여 세력이 신장된 고구려는 단군 조선 멸망 시에 요동지방에 진출했던 漢의 세력을 물려받은 後漢과 세 대결을 시작했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후한은 대무신제 때 요동태수가 이끄는 10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명재상 을두지의 지휘아래 일치단결 하여 싸우는 고구려 군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일이 있다.(서기28년)
또한 태조제대에 갈사국(曷思國:남동부여) ,조나국(藻那國), 주나국(朱那國),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면서 세력이 크게 팽창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後漢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강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후한의 요동지역을 선제 공격하여 6개 현을 정복하였고,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여 후한의 세력을 위축 시켰으며, 요동지역 일부를 점령하였고, 남으로는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며 산동반도는 물론 그 너머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명실공히 대륙의 맹주로 등장했다.
또한 태조대제 이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종주국임을 내외에 천명 하였다.  

3. 고구려의 흥망, 의의  
  고구려는 광개토경호태왕(광개토대제) ,장수홍제호태열제(장수왕), 문자호태열제(문자왕)등의 치세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국가들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더 강성해 졌다. 그리고 백제의 세력권 이었던 제, 노, 오, 월나라까지도 병합하고, 평원왕(평강상호태열제), 영양왕(영양무원호태열제)등을 거치면서 그 세력은 더운 커지고 번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300년 가까운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나리인 隨에 의해 통일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隨는 대륙을 통일하자 고구려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연전연패 한 후 결국 멸망하고, 수의 뒤를 이어 중원을 통일한 唐역시 고구려를 제압할 필요를 절감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외침에 강했던 고구려는 내부의 분열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함으로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서한, 신, 동한, 위, 촉, 오, 서진, 동진, 5족의 16국 남북조의 9국, 수, 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35개의 나라가 명멸하는 동안 천년왕조 고구려는 북방의 방파제, 그리고 겨레의 맏형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백제
同腹형제이며 부여계로 알려진 고온조와 고비류가 남하하여 고비류는 요서지역의 미추홀에 도읍하여 百濟라는 나라를 건국하였고, 고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十濟라 하였다가 영역이 넓어지면서 백제로 바꾸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국의 통합이후 비류백제의 백성들은 모두 온조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통칭하여 百濟라고 한다

1. 백제의 발전
  온조는 부여출신 이라 하여 스스로를 부여씨라 했다. 그리고 고비류의 백성들을 통합하여 백제가 건국될 당시 비류 왕족의 일부는 백제의 왕족이나 외척, 또는 귀족이 되면서 백제 8대성의 하나인 진씨나 우씨가 되었고 일부는 왜국에 건너가 지배층이 되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백제 역시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영도적 국가였던 목지국 까지 병합하면서 세력이 강성해 졌다.
고이왕은 국가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단기 2579년 (서기 246년)에는 위나라의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낙랑과 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려할 때 백제의 좌장 진충을 파견하여 요동반도에 있는 낙랑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분서왕때에 이르러는 낙랑의 서현을 점령하였고, 비류왕은 요서군(지금의 하북성)과 진평군(지금의 하남성)의 2개군을 점령하였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한반도의 남가라국, 안라국, 다라국등의 6국을 병합하고 남마한의 소국을 병합하였으며 대방지역 에서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당시 倭國은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대국 이후 가야 계열 신공황후의 사후 분열 상태에 있었는데, 근초고왕은 단기 2699년(서기 366년)에 왕자 (후일의 근구수왕)을 候王으로 삼아 이때부터 백제왕이 왜국을 직할통치하기 시작했다

2. 해상강국 백제-  2페이지
백제는 우수한 해양기술과 군사력으로 동북아시아의 제해권을 잡은 해상강국 이었다.
온조와 비류가 한반도의 중서부와 중원의 요서지역에 세운 십제와 백제가 통합한 이후 황해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넓혀 나갔다.그리하여 산동성 일대와 광서성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나갔고 뛰어난 조선술을 기반으로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자치기구인 담로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담로가 설치된곳은 한반도와 요서지역, 왜열도 등이다.
베트남 북부, 필리핀, 인도네시아등 에서도 백제담로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특히 중국에는 요서, 진평지망, 하북성, 산동성, 양자강유역의 오월(吳越)지방에 7개의 백제군이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백제는 신라, 고구려는 물론, 수, 당을 제치고 절대적인 해상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상지배권은 백제의 멸망이후 급격히 소멸되어갔고 장보고의 청해진이 폐쇄된후 완전히 중국의 漢族들에게 넘어갔다.

3백제의 멸망과 일본의 독립 -3페이지
백제가 나, 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전 지역에서 일어난 백제의 복국운동은 바다건어 倭에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며 왜국의 37대 천황이었던 寶皇女(齊明女帝)는 백제의 복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
그러나 왜국군대가 백촌강에서 당군에 패해 군선 400여척을 잃고, 백제 본국의 주유성에서 지휘부의 내부분열로 주유성이 함락되어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주유성 함락소식에 왜인들은
“주유(주유성)가 이미 항복하였다. 어찌할수 없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끊어졌다. 이제부터 조상의 묘소에도 갈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라고 하였다.
이후 본국을 잃은 왜인들은 새로운 이름의 나라와 정통성을 뒷받침 해줄 새로운 역사,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의자왕의 동생인 齊明女帝가 죽자 왜의 지도층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을 받들어 텐지천황(38대 天智天皇)이라하고 나라 이름을 日本이라고 붙였다 (단기3001년, 서기668년)

나라이름을 바꾸면서 가야, 신라, 백제 등의 혈통적, 문화적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日本書記, 古事記, 新撰性氏錄등 이른바 일본의 3대 사서 편찬 작업이다.
이때부터 왜 열도는 한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왜국의 역사는 한민족사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역사로 독립해 나가게 된다.


가야  -1페이지
  伽倻는 단군 조선이후 민족의 분열시기에 이동하여 김해등 낙동강 중 하류 지역 남 변한땅을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단기 2375년(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구야국을 모태로 금관가야(본가야)를 세웠고,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등 5가야 연맹국가로 발전하였다. 김수로왕 시대에 신라의 5대 파사 이사금은 영토분쟁이 일자 사태를 김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수로왕은 무례한 신라 6부의 지도자를 처형하였는데, 파사 이사금은 신하만 처형했을 뿐 더 이상의 보복조치는 취하지 못해 가야의 세력이 더 컷음을 알 수 있다.
가야는 특히 뛰어난 철기문화를 한반도와 왜국에 전파시켰으며, 왜에 분국을 설치하며 500년간 해상강국을 이루었다.

가야의 분국은 바다건너 왜의 구주지방에 김수로왕의 딸인 묘견공주(비미호여왕:서기 184-247까지 통치)가 야마대국을 세운 것을 말하며, 비미호여왕 사후 33대까지 가야계열이 일본최초의 고대왕국이라 일컬어진 야마대국을 통치하였다.
이렇게볼 때 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종주국으로 하고 대한 해협을 건너 일본 규슈지역의 야마대국(독로국)을 분국으로한 특별한 성격의 고대왕국 이었다.
가야는 비미호여왕의 후손인 진무 (神武天皇)가 혼슈로 이동하여 야마토 정권이 시작 되면서 차츰 야마대 분국을 통한 왜국내 배후거점을 잃게된다.
가야는 서기 6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세력에 밀린 백제와 신라가 압력을 가하고, 가야의 분국 이었던 야마대국이 몰락하녀 왜나라가 백제 근초고왕의 직할통치로 들어가자 왜국내 거점이 사라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가야국의 이뇌왕이 신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세력을 보존하고자 하였으마 이것은 오히려 가야의 통합을 저해하고 멸망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드디어 10대 구형왕이 다스리던 금관가야(본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병합 당하면서 건국 490년만에 멸망하게 된다.(단기 2865년 서기 532년 구형왕42년)
그후 금관가야의 지배층은 신라귀족으로 흡수되었으며, 김유신, 진지왕, 문무왕등은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대가야는 진흥왕이 보낸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 단기 2895년 (서기 562년)신라에 병합되고 이때 가야의 다른 9국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신라  -총 2페이지로 나눔.
  남진한의 한 국가로 출발한 사로 국은 6개의 씨족을 기반으로 한 부족연맹 이었는데 박혁거세가 6촌 촌장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었고, 국명을 사로 라고 했다.
혁거세의 자손이 계속 왕위를 이어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으로 내려가다가 바닷가에 상륙한 석탈해가 4대 왕인 탈해 이사금이 되었다.
또 김 알지의 6대 손인 김 미추는 초대 김씨 왕이 되었다. 서기 2-3세기를 거치는 동안 신라는 우시상, 거치산국, 음즙벌, 비지, 실직국, 압독국등을 병합하였고 박, 석, 김, 세씨족에서 지배세력이 교체되어 나왔다.
그러나 서기 4세기 내물 마립간 때에는 김 씨족이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부족연맹적 성격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법흥왕때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 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는등 국력의 급격한 신장을 맞이한 신라는 진흥왕때 백제의 성왕과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에 진출한후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연맹의 전지역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사국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신라는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민족의 눈으로 볼 때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 즉 외교를 통해 당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 시킨후 고구려와 백제가 있던 지역을 점령하고 신라까지 통치하려다가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결사항전을 펼치자 결국 신라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배신의 역사를 통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그후 영역이 확대되고 백제, 고구려의 견제없이 대외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 시기를 후기신라라 하며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260년을 말한다

대진국(발해)  
고구려의 멸망이후 신라가 포기한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는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대진국(발해)이 건국되어 227년간 고구려의 맥을 이어갔다.

  대륙강국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무너진 이래 각지에서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다.
그러한 시기에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제의 아들로 알려진 고덕무는 대조영으로 성씨개명하고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대진국 (大震國)이란 나리를 세웠다(698년) 원래 震國은 단군 조선을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다. 대진의 영토는 5000리 번성기에는 9000리에 이르렀으며 역사는 229년간 지속 되었다. 지나인들은 대진국이 발해만의 저쪽에 있다하여 渤海라 불렀다.

대조영은 말갈족의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족의 장수 이진영등과 손을 잡고 대진을 건설했다.  1대 고황제 의 아들인 2대 무황제 는 말갈족중 독립을 끝까지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대진의 연맹에 복속시켰고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 냈다 `
3대 문황제때는 한단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다시 설립하고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단기고사를 강의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지배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9세기에 들어 대진국은 크게 융성 하였으며 10대 선황제때는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게된다.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대진의 문화가 꽃피운 시기이다.

1949년 만주 길림성에서 발견된 문황제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비문에 3대 문황제의 大대興진이란 연호가 발견 되어 중국에서 주장하는 대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제후국“ 이 아니라 건원 칭제하는 황제국가였음이 드러났다.
이는 대외적으로 당과 대등하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며 대내적으로 왕권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것 이기도하다.

그러나 한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대진국은 고구려, 백제와 비슷한 경로로 쇠망해 갔다.
당나라식 문물과 불교의 수용으로 대진의 주체성이 흐려져 갔다. 그리고 10대 선황제가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화 과정은  다른 종족들을 존중해 오던 대진국 연맹체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거란은 북부여족 중심의 중앙 집권화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대진국 15대 애제(哀帝)에 이르러 수도 상경을 점령하고 대진국을 멸망시켜 버렸다(서기 926년)

신라의 통일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무대는 대륙에서 한반도로 줄어들었고 대진의 멸망을 계기로 만주벌판과 시베리아가 우리 민족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후 우리민족은 대륙민족에서 본격적인 반도민족으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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