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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제하의 한국사 왜곡
작성자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    [ 211.178.20.4 ] 날짜 2003-12-04
이메일 조회 17410
내용

   한국사 왜곡에 대한 대응

  민족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이른바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 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오, 원려한 민족 독립 운동의 점진 형태이다. 생각컨대, 언어는 사람의 지적․정신적인 것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사람의 의사․감정을 표현하는 이외에 그 특성도 표현하는 것이므로, 민족 고유의 언어는 민족 안에 있어서 의사의 소통은 물론 민족 감정 및 민족 의식을 빚어내어 이에 굳건한 민족의 결합을 성취시키며, 그것을 기록하는 민족 고유의 글자가 있어서 이에 민족 문화를 성립시키는 것이니 약소 민족은 필사의 노력으로써 그것을 유지․보전하기에 힘쓰며, 아울러 그 발전을 꾀하여 방언의 표준어화, 문자의 통일과 보급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조선어학회 선고문]

  식민 사관의 정체

  오늘날 학계에서 청산해야 할 일제 식민지의 잔재로 우선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식민 사관의 문제다. 일제가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왜곡 서술한 식민사관은 근대 학문의 토대를 닦지 못했던 일제 당시 우리 학계로 그대로 주입돼 광복 이후에도 악성 종양처럼 남아 있었다. 사학계에는 특히 지난 60년대 이후 식민 사관의 허구성을 허물어뜨릴 만큼 많은 학술적 성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여러 형태로 식민사관 논리를 알게 모르게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그 청산의 문제는 숙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식민사관은 한국 역사의 타율성론과 반도적 성격론, 근대화론, 당파성론 등 그 영역도 지극히 광범위하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는 다르나 일제가 한국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청․일 전쟁 이후라는 것이 통설이다. 연구는 일제가 만주와 한국 경영을 위해 1908년 만철 동경 지사 내에 ‘만철 지리 역사 조사실’을 설치하면서 이루어졌다. 연구의 테마는 당연히 ‘만선사’였다. 만주에 괴뢰국이 세워진 후 ‘만선사’ 연구는 한층 체계화되어 이른바 ‘만선사관’이라는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이 ‘만선사관’은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인, 한국이 태고적부터 대륙, 특히 만주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볼 경우 한국 역사는 만주의 세력 파급에 놓이는 역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 셈이 된다.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논리는 한국이 동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적 존재여서 외세 침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지리적 결정론인 미나미의 ‘반도 성격론’으로 한층 체계화됐다. 또 조선 왕조의 정치를 당쟁으로 규정하면서 한국 민족성의 특징을 당파성으로 확대 해석한 논리나, 한국 사회의 내적 발전을 부정하는 ‘정체성론’도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적절하게 이용됐다. 이들 논리는 결국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의식의 잔흔(殘痕)으로 남아 열등의식을 부추겼다. 일제 식민지 정책이 봉건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일제의 ‘근대화론’이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학자 안모 교수의 ‘중진 자본주의론’이 신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한 논문이 발표돼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안교수가 광복 이후 한국의 급격한 자본주의적 공업화 과정이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급격한 자본주의화 과정의 연장선에 있다고 파악하는 나카무라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 논문은 선진국의 이론이라면 걸러 내지 않고 받아들이기에 급급한 학계 풍토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식민 사관의 극복은 우리 학계 스스로가 역사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총체적인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길만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일러준다. [세계 일보 95. 01. 09.]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한국 문화의 기반이 되는 한국어와 한국사 및 전통 문화에 대하여 탄압 정책을 사용하여 민족 말살을 획책하였다. 그들은 국문연구소를 폐지하여 국어 교육을 제한하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과학적인 국어 연구를 통해 일제에 대항하며 기관지 ‘한글’을 발간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사전의 편찬,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발표하여 우리 나라 국문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항거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수호의 노력은 민족사의 연구 활동을 통해서도 전개되었다. 일제 관학자들이 민족사를 말살 왜곡하려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한국사의 주체성 그리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민족 독립의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은식은 <역사상 위대한 전기>를 비롯하여 <한국 통사>,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국혼 중심의 역사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은 국사의 자주성을 강조하였으며 광문회와 신문관을 통하여 국사의 대중화와 고전 간행에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 이병도를 중심으로 진단학회는 근대 실증사학적인 방법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


<출처 : http://dev.cein.or.kr/cai/cew0004/K-3/일제/역사왜곡.htm>



일제하의 한국사 왜곡


   한국사 왜곡에 대한 대응

  민족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이른바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 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오, 원려한 민족 독립 운동의 점진 형태이다. 생각컨대, 언어는 사람의 지적․정신적인 것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사람의 의사․감정을 표현하는 이외에 그 특성도 표현하는 것이므로, 민족 고유의 언어는 민족 안에 있어서 의사의 소통은 물론 민족 감정 및 민족 의식을 빚어내어 이에 굳건한 민족의 결합을 성취시키며, 그것을 기록하는 민족 고유의 글자가 있어서 이에 민족 문화를 성립시키는 것이니 약소 민족은 필사의 노력으로써 그것을 유지․보전하기에 힘쓰며, 아울러 그 발전을 꾀하여 방언의 표준어화, 문자의 통일과 보급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조선어학회 선고문]

  식민 사관의 정체

  오늘날 학계에서 청산해야 할 일제 식민지의 잔재로 우선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식민 사관의 문제다. 일제가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왜곡 서술한 식민사관은 근대 학문의 토대를 닦지 못했던 일제 당시 우리 학계로 그대로 주입돼 광복 이후에도 악성 종양처럼 남아 있었다. 사학계에는 특히 지난 60년대 이후 식민 사관의 허구성을 허물어뜨릴 만큼 많은 학술적 성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여러 형태로 식민사관 논리를 알게 모르게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그 청산의 문제는 숙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식민사관은 한국 역사의 타율성론과 반도적 성격론, 근대화론, 당파성론 등 그 영역도 지극히 광범위하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는 다르나 일제가 한국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청․일 전쟁 이후라는 것이 통설이다. 연구는 일제가 만주와 한국 경영을 위해 1908년 만철 동경 지사 내에 ‘만철 지리 역사 조사실’을 설치하면서 이루어졌다. 연구의 테마는 당연히 ‘만선사’였다. 만주에 괴뢰국이 세워진 후 ‘만선사’ 연구는 한층 체계화되어 이른바 ‘만선사관’이라는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이 ‘만선사관’은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인, 한국이 태고적부터 대륙, 특히 만주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볼 경우 한국 역사는 만주의 세력 파급에 놓이는 역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 셈이 된다.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논리는 한국이 동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는 반도적 존재여서 외세 침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지리적 결정론인 미나미의 ‘반도 성격론’으로 한층 체계화됐다. 또 조선 왕조의 정치를 당쟁으로 규정하면서 한국 민족성의 특징을 당파성으로 확대 해석한 논리나, 한국 사회의 내적 발전을 부정하는 ‘정체성론’도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적절하게 이용됐다. 이들 논리는 결국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의식의 잔흔(殘痕)으로 남아 열등의식을 부추겼다. 일제 식민지 정책이 봉건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일제의 ‘근대화론’이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학자 안모 교수의 ‘중진 자본주의론’이 신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한 논문이 발표돼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안교수가 광복 이후 한국의 급격한 자본주의적 공업화 과정이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급격한 자본주의화 과정의 연장선에 있다고 파악하는 나카무라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이 논문은 선진국의 이론이라면 걸러 내지 않고 받아들이기에 급급한 학계 풍토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식민 사관의 극복은 우리 학계 스스로가 역사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총체적인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길만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일러준다. [세계 일보 95. 01. 09.]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한국 문화의 기반이 되는 한국어와 한국사 및 전통 문화에 대하여 탄압 정책을 사용하여 민족 말살을 획책하였다. 그들은 국문연구소를 폐지하여 국어 교육을 제한하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과학적인 국어 연구를 통해 일제에 대항하며 기관지 ‘한글’을 발간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조선어 사전의 편찬,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발표하여 우리 나라 국문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항거하였다. 또한 민족 문화 수호의 노력은 민족사의 연구 활동을 통해서도 전개되었다. 일제 관학자들이 민족사를 말살 왜곡하려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한국사의 주체성 그리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민족 독립의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박은식은 <역사상 위대한 전기>를 비롯하여 <한국 통사>,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 등을 저술하여 국혼 중심의 역사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은 국사의 자주성을 강조하였으며 광문회와 신문관을 통하여 국사의 대중화와 고전 간행에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 이병도를 중심으로 진단학회는 근대 실증사학적인 방법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


<출처 : http://dev.cein.or.kr/cai/cew0004/K-3/일제/역사왜곡.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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