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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당과 연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세기 동안은 태평성대로 문화는 크게 발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귀족들은 개인적으로 사찰을 짓기도 하고 당의 장안을 본떠 풍요와 사치의 극을 달렸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와 정치를 독점한 중앙귀족은 신라 혜공왕(765- 780)을 기점으로 수많은 반란을 일으켜 권력쟁탈전
 
에 나서게 된다. 반란의 와중에서 150년간 무려 20여명의 임금이 바뀌었고, 즉위한지 1년이 못되어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던 화랑들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가 계속되자 유흥과 향락에 빠져들고, 신라정치의 중심 축었던 골품제는 그 폐쇄성 때문에 6두품 출신 등 지식인계급은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유리되어 가는 등 신라는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중앙의 통제력은 약해지고 지방세력인 호족들이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사병을 보유하여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52대 효공왕 무렵에는 신라의 세력이 겨우 경주일원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들 지방세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가 궁예와 견훤이었다. 이들이 큰 세력을 이루어 각기 나라를 세움으로서 신라, 후백제, 후 고구려(마진, 태봉으로 국호변경)의 후 삼국 체제로 들어간다. 통일이라는 명분을 세워 중원의 패자였던 고구려와 일본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는 소위 통일시대 이후 2세기를 겨우 넘기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시대적 배경
고려중기 문종의 전성기 이후 예종은 여진을 정벌하는 등,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문치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고, 현종, 문종으로 이어진 고려 태평시대의 마지막 시대였다. 특히 의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실의 권위는 약화되고 현종 이후 왕실과 외척 관계를 이루어온 인주 이씨의 전횡이 두드러져 인종 때의 權臣 이자겸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때 나라밖에서는 거란의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형제관계를 요구하더니 드디어는 군신관계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있던 이자겸 일파는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사진은 부를 축적한 사찰]
 
금 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稱臣上表의 굴욕적인 사대를 하였고 안으로는 세력이 더 커지자 스스로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자겸의 난은 김부식 등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정권이 김부식 일파로 넘어간 것에 불과 했으며 이자겸의 난을계기로 하극상의 풍조가 성행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들이 내부적 반란을 수없이 일으켰다.
 
2) 서경 천도 설과 묘청의 난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유교와 함께 화랑도 정신 또한 중요시했으나, 고려가 점차 기틀을 잡아가면서 불교와 동시에 유학을 크게 장려했다. 광종의 과거제 실시이후 성종 때는 최승로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아 정치제도의 유교이념을 내세웠다. 이후 유학자는 대개 尊華의 견지에서 사대주의 색채를 짙게 풍겼다. 이에 비해 국풍파(國風波: 郎敎徒와 佛敎徒)는 국체상의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어 정책적으로 압록강 이북의 옛 영토를 회복할 것을 전제로 하고 북진정책을 주장했다. 이들 양자는 조정에서 늘 대립하게 되었다. 인종 때에도 이들의 정치적 대립은 치열했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는 북벌, 稱帝를 주장했으나 儒臣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묘청은 서경 천도와 칭제 그리고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더구나 당시의 개경은 이자겸의 난으로 인하여 궁궐이 불타 없어지고 황폐해 졌으며 인심도 매우 흉흉한 상태였다. 묘청은 이를 개경의 지덕이 쇠한 때문이라고 하며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했다. 그러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김부식을 비롯한 문벌 귀족은 이를 즉각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고집하였다. 김부식 일파가 내세운 명분은 以小事大는 先王之道이며 칭제건원의 주장은 금 나라를 격노케 하여 국내 안정과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묘청은 김부식 일파의 강한 반발로 서경천도 계획이 좌절되자 백수한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묘청은 나라를 세워 이름을 大爲, 연호를 天開라 하였으나 군사를 일으킨 이후에도 崔京을 인종에게 보내어 서경천도를 거듭 주장한 것으로 미루어 왕권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묘청의 난은 尊華事大에 물든 개경의 기득권 층인 문벌귀족에 의해 자행되는 고려의 중국화에 대한 한민족 자주화 운동이었으며 고려 재 건국 운동이었다. 그러나 묘청의 서경군은 진압군 총 사령관인 김부식이 유도한 내부 분열로 묘청이 살해되었고 군량 부족으로 서경은 함락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이후 권력을 잡은 문벌 귀족이나, 무신을 난을 통해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모두 개인의 정권 지키기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독점하였고 그 결과 왕권과 국가의 힘은 쇠잔해 졌다. 게다가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족이 징기스칸이라는 영웅에 의해 원나라가 세워지고,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고려에 침입해 오자(1231년) 고려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1231년에 시작된 몽고와의 전쟁은 1258년까지 약 30여년간 계속 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이 시작되자 강화도로 도망간 최씨의 고려정부는 싸움은커녕 향락과 사냥에 빠져 있었다. 그 잔인한 몽고군의 손에서 나라를 지탱한 것은 오히려 무시되고 천대받았던 농민군, 천민군 이었다. 그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초토화 작전"으로 유명한 몽고군에 30여년간 항전할 수 있었다. 몽고군과 맞서 30년이나 항전한 것은 세계에서 고려가 유일했다.

한편 이 몽고의 침입 기간 중 부처님의 힘을 빌어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염원은 이제는 전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을 낳았다.

 
 
강화도로 피신하며 정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했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왕실은 개경으로 환도(1270)하고 이때부터 시작된 원의 지배는 약 100년간 지속되었다. 원의 지배방식은 고려왕실을 통한 간접통치였다. 이후 고려왕의 명칭은 종이나 조가 아닌 왕으로 격하되었으며 차기 임금은 원에서 자라야 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등 고려왕의 시호에 붙은 忠은 바로 元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사진은 천산대렵도)

그러나 강대국 원도 14세기 들어 세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주원장이 남경을 손에 넣으며 漢族의 명나라가 건국되었다(1356년) 이틈에 고려의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펴기도 했으나 개혁의 주역이었던 신돈이 제거되고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방황하던 공민왕 또한 환관 최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중단되고 만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했지만 그후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이 중앙정치 무대에 자리잡게 되고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인물로 등장한 이성계가 그들과 결합하여 위화도회군을 일으킴으로서 고려의470년 사직은 막을 내리게 된다(1392년)